그린 그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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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 3의 남자
일류 각본가는
단순한 이항대립을 좋아하지 않고
제 3의 요소인 "녹색"을
색채로서 준비한다
뛰어난 이야기꾼은
종지부를 찍은 뒤에
그 "녹색"을 주역에 앉힌다
뒷이야기를 자아내어
전설에 깊이를 더한다
-JRA 명마의 초상
일명 "녹색의 자객"이라는 이명으로 불리며 "천마" 토쇼 보이, "유성의 귀공자" 텐 포인트와 함께 70년대 일본 경마의 중심이었던 TTG 삼강 구도의 한 축을 담당했던 일본의 경주마. TTG 중 가장 오래 활동하며 1차 경마 붐의 마지막과 커리어를 함께한 말이다.
1.1. 혈통[편집]
아버지인 인터메조는 하이페리온의 직계로 영국의 클래식 장거리 대회 세인트 레저 우승마인 정통파 스테이어 혈통이다. 인터메조는 사쿠라 스타 오, 슈퍼 크릭의 BMS 이기도 하다.
외조부 님버스는 1949년 영국 2000기니 스테이크스와 더비 스테이크스를 우승한 2관마이다. 다만 부상으로 인해 세인트 레저 스테이크스에는 도전하지 못했다.
모계 3대모 달링은 토키노 미노루의 전형제 누나다.
2. 생애[편집]
2.1. 1976년[편집]
데뷔 전 폐렴에 걸려 3세 시즌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늦은 데뷔를 하게 되어 4세(당시 기준) 신마전을 토쇼 보이와 같이 치루었고, 4착으로 패배. 거리를 늘려서 도전한 다음 신마전도 4착, 이후 미승리전은 거리도 늘리고 더트로 바꾸어 가며 간신히 1승을 달성했다. 이후 NHK배에서 12착으로 참패하며, 동기들이 사츠키상, 더비의 빛나는 무대에서 뛰는 사이 그린 그래스는 진흙탕을 헤메고 있었다.
참패 후엔 주전 기수를 데뷔 이전의 훈련 때부터 그린 그래스를 눈여겨 보고 안장이 비면 자신을 불러달라던 야스다 토미오로 변경한 뒤 4경기 동안 1착 2회, 2착 2회[2] 로 한꺼풀 성장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킷카상에 나갈 만한 상금은 쌓이지 않았고, 대기 후보 중에서도 최하위인지라 누적 상금이 더 높은 말이 하나라도 참가 의사를 밝히면 후보 자리에서조차 쫓겨나는,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 조교사는 부정적이었지만 마주의 강력한 의지로 후보 중 꼴찌[3] 로 대기하게 된다. 거기다 킷카상을 못 나가게 될 경우 가려고 해둔 경기의 등록도 모조리 취소하는 배수진을 펼친다. 이때 기수 야스다는 다른 예정된 말의 기승도 포기해가며 그린 그래스에 타기로 하고 아직 출전이 결정되지도 않은 후보 상태에서 미리 사전 축하연을 열고 그곳을 국화로 장식하는 등 필사적으로 기원했다고 한다. 이런 진영의 의지가 통했는지 경기 전까지 하루, 하루 출전 사퇴가 이어진 끝에 기적적으로 출주가 확정된다.
그렇게 힘겹게 참가한 킷카상에서 그린 그래스의 단승 배율은 71.1배, 12번 인기로 사실상 신마전 때부터 계속 거리가 짧아서 힘을 못 내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과, 아버지 인터메조의 스테이어 적성이라면 혹시 모른다는 플루크성 역배 말곤 주목할 것 없는 우승권 밖이란 평가였다.
그러나 맹렬한 견제를 피해 최종 직선에서 외곽을 달리게 된 토쇼 보이와 텐 포인트를, 최내곽에 바짝 붙어 치고 올라가는 선입 스퍼트로 따내버리며 킷카상 역대 최고 단승 배율 기록을 남기게 된다. 토쇼 보이에게 있어선 차고 지나갈 돌멩이나 다름없던 그린 그래스의 화려한 복수전, 훗날의 TTG 트리오가 처음으로 한데 모여 겨룬 경주였다. 그러나 불청객에 가까운 존재였던 그린 그래스의 우승을 사람들은 운이 좋았을 뿐인 플루크 취급하며 정당한 평가를 받진 못했다. 이 승리로 생긴 별명은 녹색 멘코의 자객, 정면 대결이 아니라 기습해 승리했다는 인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린 그래스는 아리마 기념에 예비등록을 하지 않은 바람에[4] 이 킷카상이 그 해의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2.2. 1977년[편집]
이듬해의 첫 대회인 아메리칸 자키 컵에서 비록 TT는 없었지만 레코드를 달성하며 우승했고 이 기록이 1회 재팬 컵 전까지의 도쿄 2400m 레코드로 유지된다. 나카노 조교사의 말에 의하면 이때가 그린 그래스의 기량이 절정이었던 경기라고. 이후 대형 스테이어의 숙명인 만성적인 각부, 요골 불안에 시달리며 게시판에는 들지만 1착은 하지 못하는 아쉬운 성적이 이어진다. 메구로 기념 2착, 스테이어의 주무대여야 했을 천황상(봄)에서도 텐 포인트에게 패배하여 4착, 토쇼 보이의 복귀전인 타카라즈카 기념에선 TT의 혈투에 끼어들지 못하고 3착에 그치며 3연패. 이 책임을 지고 기수 야스다 토미오는 그린 그래스에서 내리게 되며 이후 암말의 명수로 유명한 시마다 이사오가 기수가 기승한다.
타카라즈카 이후엔 다시 TT가 없는 대회에서 1승을 올리며 태세를 가다듬었고, 다시 나간 천황상(가을)에선 토쇼 보이를 만나게 된다. 킷카상의 패배는 거리 적성이 아니라 마장 탓이라 부정한 토쇼 보이 진영에 있어 천황상에서 만나기엔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킷카상마 그린 그래스였고, 킷카상의 승리 이후론 TT를 만나면 쭈구리가 되는 거 아니냐는 평으로 내려쳐지던 그린 그래스 진영에게도 나름 홈그라운드인 초장거리 대회는 그야말로 차려놓은 설욕의 기회였지만, 너무 서로를 의식하고 견제한 나머지 둘은 도중에 힘이 다 빠져 퍼져버렸고, 그래도 간신히 5착으로 게시판에는 올라가 순위상으로는 토쇼 보이를 앞섰지만 이걸 이겼다고 주장하기는 서로 너무 초라한 결과였다.
토쇼 보이의 은퇴전인 77 아리마 기념은 절정에 오른 TT의 기량과 밤색의 괴물 마루젠스키의 출주 예정 등 어지간한 말들이라면 본전도 챙기지 못할 게 뻔한 곳이 되었고 이에 따라 출주 회피가 속출했지만, TT에 비교할 수준이 아니라는 세간의 평가 따위 알 바 아니었던 그린 그래스 진영은 피해서 도망갈 생각 따윈 없었다.
저조한 컨디션에도 불구하고 끝맺음을 지으러 나온 토쇼 보이와 최후의 기회니 죽어도 이기겠다는 텐 포인트의 의지가 충돌하는 가운데 그린 그래스만은 이미 멀리 뒤로 떨쳐진 다른 말들과는 달리 끝까지 TT를 사정권에 넣고 따라붙는 괴력을 보여주었다. 결국 텐 포인트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TT의 뒤에 붙은 G라는 그림자의 존재만은 누가 봐도 확실하게 남는 것이었다.[5][6]
2.3. 1978년[편집]
이번 해에도 아메리칸 자키 컵으로 새해 첫 개시를 시작한 그린 그래스, 머리 차이의 2착이라는 아쉬운 결과를 받는다. 그리고 그날 비보가 들려왔다. 같은 날 니혼게이자이 신문배에 출주한 텐 포인트의 골절 사고. 2개월에 걸친 치료 시도에도 불구하고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벽과 같았던 두 라이벌이 사라졌지만 그린 그래스의 시대가 온것은 아니었다. 그린 그래스도 만성 부상에 시달리는 처지라 많은 경기를 뛸 수 없었고 이에 진영은 남은 팔대경주만을 목표로 좁히게 된다. 첫 목표는 바로 세 번째의 천황상 도전. 시마다 기수의 낙마 부상으로 4세 시절 한 번 타본 인연이 있는 오카베 유키오로 기수가 교체되고 트라이얼을 위해 출전한 오픈 경기에선 작년의 아리마 기념에서 접근조차 시키지 않았던 프레스 토코에게 패하는 등 여전히 요골의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으나 천황상 직전엔 컨디션이 크게 회복, 만전 상태로 나서게 된다.
최종 코너에서 프레스 토코의 기수의 안장이 미끄러져 낙마도 아닌데 경기를 포기하는 드문 상황이 발생, 거기에 선두 그룹의 기수 몇몇이 시선을 뺏긴 이 어수선한 타이밍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린 그래스는 4, 5위의 포지션을 유지하다가 스퍼트를 시작. 토후쿠세단, 카슈치카라의 추격을 1마신차로 지켜내며 골, 세 번의 도전 끝에 천황상 타이틀을 손에 넣는다. 기수 오카베에게 있어서도 데뷔 10년을 넘어 얻은 첫 천황상이었다.
이어진 타카라즈카 기념에선 천황상의 활약도 있어 팬투표 1위, 인기 1위로 출주한다, 에리모 조지, 호쿠토 보이까지 가까운 연배의 천황상마가 셋이 모인 화려한 경기에서 기분파 괴짜 말 에리모 조지의 마이페이스 도주를 따라잡지 못하고 4마신차의 2착에 그친다.
그리고 아리마 기념은 다시 도진 각부 불안과 감기까지 겹쳐 대책이 없는 상태로 출주하게 됐고, 자신에게 유리한 슬로우 페이스의 경주에도 불구하고 6착으로 크게 무너지고 말았다.
2.4. 1979년[편집]
천황상도 졸업했지만 아직 숙제는 남아 있었다. 그랑프리, 춘추 제패는 아니라도 둘 중 최소한 하나. 어쩌면 킷카상의 첫만남 이후로 항상 자신의 앞을 달리던 TT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여전히 각부 불안에 시달렸기 때문에 천황상이 사라진 그린 그래스의 출주 일정은 아주 담백했다. 아메리칸 자키 컵, 타카라즈카 기념, 장기 휴양 후의 복귀전으로 오픈급 경주 한번, 그리고 아리마 기념.
전반기의 두 경기는 둘 다 78년의 더비마 사쿠라 쇼리에게 패배하며 2착, 3착에 그친다.
아리마 이전의 오픈 경기는 더 심했다.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았던 상대인, 오픈에서나 겨우 승리하고 중상에선 힘을 못 쓰던 두 살 밑의 애송이 메지로 이글[7] 의 도주를 잡아내지 못하고 5마신차 2착으로 참패한다. 같은 경기에서 1착과 10마신차로 무너진 동기 천황상마 호쿠토 보이보단 순위가 높았다는 게 슬픈 위안거리였다. 그린 그래스 진영은 이 경기 결과가 나온 뒤 아리마 기념을 마지막으로 은퇴하기로 결정한다.
이 해의 아리마 기념은 4세부터 7세까지의 나잇대별의 명마들이 총집합, 최초의 16두 풀게이트로 열리게 된다. 그린 그래스의 팬투표 순위는 사쿠라 쇼리에게 밀린 2위였다.
이 라스트런에서 오카베는 하츠시바 오에 기승하기 위해 떠났고 오사키 쇼이치로 기수가 변경된다. 라스트런을 처음 만난 기수와 치르게 된 꼴, 나카노 조교사도 많은건 지시하지 않고 인코스를 잡고 3코너에서 나아가라는 간략한 지시만을 내린다.
グリーングラス、栄光のさようならゴール!!!
그린 그래스, 영광의 "잘 있어요" 골!!!
늘 하던 대로 중단 선행 그룹에서 대기하던 그린 그래스. 빙고 걸이 부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하여 레이스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움직이는 순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롱 스퍼트를 시작[8] , 인코스를 유지하며 전진하며 3코너부터 선두에 서게 된다. 4코너를 빠져 나갈 때에도 펜스에 붙어있는 듯한 인코스를 그대로 유지, 똑같이 인코스를 타며 추격해오던 사쿠라 쇼리는 스퍼트 직전 그린 그래스의 절묘한 페이스 다운에 걸려들어 스퍼트 타이밍을 놓치고 옆으로 빠져 나갈 길도 메지로 팬텀[9] 에게 막혀 놓치며 그대로 속력을 잃고 만다. 외곽에서 달려나온 메지로 팬텀은 사쿠라 쇼리만이 아니라 카네 미노부, 하시그란츠의 추격 루트를 그야말로 잡아먹어가며[10] 엄청난 말각으로 맹렬히 추격해왔지만 그린 그래스는 결승점까지 코 차이를 지켜냈다.
라스트런을 승리로 마친 그린 그래스는 TT와 같이 연도대표마를 수상하고 TTG 중에서 최고, 그리고 당시 기준 역대 최다 상금 기록도 세우게 된다. 전적 중에서 게시판을 벗어난 적은 단 두 번뿐인 안정감을 보였지만 1착의 수가 적은 것이 흠으로, 스테이어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진 못한 것으로 평가된다. 사실 스피드를 낼 수 있던 최전성기의 중거리 경주에선 TT라는 세대 최고의 스타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린 그래스의 은퇴는 TTG 3강 전설의 완결이자 하이세이코로부터 시작된 1차 경마 붐의 끝을 고하는 사건이었다. 이후에도 명마로 불리는 말들은 있었지만 TTG에 비견할 만한 인기를 누린 스타 호스의 등장은, 토쇼 보이의 아들이자 터프의 연출가라고 불리며 사랑받은 미스터 시비가 등장하는 날까지 미뤄진다.
2.5. 은퇴 후[편집]
종마 활동에선 장거리 스테이어에 대기만성이라는 인상이 깊은 커리어 상 큰 인기는 없었다. 능력이 뛰어난 자식들은 각부 불안도 같이 물려받는 경향이 있어 자식들이 한계점을 넘어 크게 성장하질 못했다는 평가.
대표 산구 중 하나인 토시 그린은 5살 때부터 단거리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두 번의 중상 우승을 달성, 개화하는 듯 했으나 G2 CBC상에서의 우승을 마지막으로 제엽염이 발병해 안타깝게도 안락사를 맞았고, 토쇼 팔코는 토쇼 보이의 조카와 낳은 자식인데 성적보다는 매끈한 마체에 밤색털+환한 금발 갈기의 오바나쿠리게(尾花栗毛)에 길쭉한 유성 등 잘생긴 말의 조건을 두루 갖춘 수려한 외모가 더 유명[11] 했다. 은퇴가 결정되자 전국 각지의 승마클럽과 경마장에서 우리가 데려가고 싶다는 문의가 쏟아졌을 정도. 최종적으로는 도쿄 경마장의 유도마가 되어 팬들로부터 사랑받다가 19세에 죽었다.
그래도 G1 우승 산구가 없진 않은데,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배에서 우승한 리워드 윙. 그 외의 경기에선 중상보단 오픈급에나 맞는 수준의 말이긴 했지만 클래식 마지막 경기에서 깜짝 우승을 한 점은 아비를 닮은 부분. 리딩사이어 순위는 37위가 최고였다.
그래도 토쇼 보이의 삶보다도 긴 종마 생활을 지내다 1997년에 종마에서도 은퇴하고 목장에서 마주의 사비 지원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 2000년 방목 중 쇠파리에 물려 놀란 나머지 울타리에 돌진, 크게 부딪혀 현역 시절에도 골을 썩히던 우측 앞다리에 분쇄 골절을 입는다. 연명을 위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한 채 예후불량 진단을 받고 28살의 나이로 안락사되었다.
3. 기타[편집]
- 그린 그래스의 마주는 원래 마명에 유명 인사의 이름을 그대로 갖다 쓰는 기묘한 장난질을 즐겼으나 그린 그래스의 이름을 지을 땐 줄리어스 시저, 알랭 들롱을 제출했다가 반려당한 끝에 그린 그래스라는 이름이 나오게 됐다.
- TT의 활약 당시엔 담당 조교사까지도 아리마 기념 인터뷰에 말했듯 딱히 라이벌리를 의식하지 않았고 주변에서도 그린 그래스를 TT에 엮진 않았다. 이후 그린 그래스를 재평가하는 과정에서 79년 아리마 기념에 해설로 나온 오오카와 케이지로 평론가의 "TTG라 불러주고 싶다"는 의견이 안 그래도 3강 구도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제대로 꽂혔던 것. 전적을 되새기면 셋이 함께 나온 경기에선 항상 1, 2, 3착을 주고 받는 그림 같은 구도[12] 가 나오고, 각자의 적성 거리와 각질[13] , 전성기의 힘의 균형[14] , 각양각색의 결말[15] 까지도, 가상의 소설로 만들기도 힘들 완성도 높은 3강 구도였기에 냉정하게 전적을 보면 그 둘에 비해 한수 밀리는 그린 그래스가 거부감 없이 트리오로 편입될 수 있었다. 지금도 쇼와 시절 경마판을 떠올리는 노년층에서 후대의 3강 구도를 탐탁치 않게 여기며 진정한 경마계 3강은 TTG 뿐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것도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
- 타본 기수들은 모두 입을 모아 침착하고 머리가 좋은 말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천황상을 함께 한 오카베 유키오 기수는 각부 불안 문제만 없었으면 동세대에 적수가 없었을 거라는 고평가를 하기도...
- 은퇴식에는 톰 존스의 그린 그린 그래스 오브 홈이 음악으로 흘러나왔다.
- 승부복이 그래스 원더와 똑같다. 거기다 관명 그래스도 그린 그래스의 이름에서 따간 것이라고. 두 말의 마주들은 쌍둥이 형제로 각각 개인 마주로 활동하며 끈의 색만 다른 디자인의 승부복을 쓰고 있었는데 86년부터 아예 명의를 합쳐 형 쪽의 승부복으로 통일하게 된 것.
4. 경주 성적[편집]
[1] 당시 기준으로 28세.[2] 이중 마가렛 상은 오카베 유키오가 대신 기승해 2착을 했다.[3] 출주 우선순위 21두 중 21두[4] 당시의 킷카상은 11월 후반에 열렸다. 그 킷카상 출전도 불투명한 누적 상금으로 아리마 기념을 생각했을 리가...[5] 아리마 기념 이후의 인터뷰에 의하면 나카노 조교사는 애초에 TT와 서로 라이벌이란 의식도 없고, 그린 그래스의 불안한 오른쪽 앞다리의 상태를 관리하는 데에만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6] 여담으로 이전 기수인 야스다는 내곽에 붙지 못한게 패인, 인코스에서 추격했다면 그린 그래스가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 말했고 기승했던 시마다 역시 동의하는 의견을 밝혔다. 다만 당일 한신 경기장의 내곽은 마장 상태가 엉망이었기 때문에 출전마 모두가 인코스를 피했던 것이라 아쉬움에 따른 변명이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7] 메지로 파머의 부마.[8] 오사키 기수가 카부토 시로를 타고 67년 아리마 기념에서 우승 했을 때의 전략이었다. 카부토 시로는 인기 순위가 낮아지면 오히려 분발해서 우승, 1위가 되면 태업하는 듯이 쑤셔박히는 성적을 내며 '신문을 읽는 말'이라 불릴 정도의 변덕쟁이 성격으로 유명했던 말이지만, 그린 그래스는 침착하고 머리가 좋은 말이니 사인에 잘 따라줄 것이라 생각했다고.[9] 검은 탄환으로 불리며 추입 각질과 멋진 말각으로 팬들에게 사랑 받은 말. 다만 시대와 상성이 안 맞았다고 해야 할지 전성기에 승운이 너무 없어 9살까지 잔디 중상전선에서 현역으로 뛰었으나 44전 5승이라는 전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 해에는 이미 코 차이로 천황상을 놓친 상태.[10] 엄청난 사행을 동반한 스퍼트인지라 카네 미노부의 기수가 항의하여 심의에 들어갔지만 메지로 팬텀의 기수 요코야마 토미오가 기승 정지 처분을 받는 선에서 그치고 순위는 유지되었다.[11] 이벤트로 가장 외모가 수려한 경주마 투표를 하면 어지간하면 1위, 못해도 3위 안에 들어온다.[12] 셋이 함께 출주한 경기는 3경기였고, 그 3경기의 승자도 킷카상 그린 그래스, 타카라즈카 토쇼 보이, 아리마 텐 포인트로 각각 달랐다.[13] 토쇼 보이 마일~중거리, 도주~강선행 / 텐 포인트 중~장거리, 선행~선입 / 그래스 원더 장거리, 선행~선입[14] 누가 봐도 셋 중 최약체는 그린 그래스지만, 가장 먼저 킷카상에서 토쇼 보이와 텐 포인트를 이겨봤고, 텐 포인트는 이후 그린 그래스는 쉽게 쓰러뜨렸지만, 계속 토쇼 보이를 이기질 못하며, 토쇼 보이는 장거리에서 그린 그래스에게 설욕하지 못한다. 각 시점마다 그 때 누가 더 강한지는 아주 확실하게 보이는데도 계속 기묘하게 물고 물리는 관계.[15] 라스트런에서 처음으로 라이벌에게 패배하며 은퇴 / 평생의 라이벌을 이긴 뒤의 첫 경기에서 부상으로 인해 죽음 / 다른 라이벌들이 경마계를 떠난 후 그들 몫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며 라스트런의 승리로 먼저 떠난 라이벌들의 업적에 도달하며 은퇴.[16] 현 닛케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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